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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1919] 참혹한 학살의 현장, 제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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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13 10:28 조회1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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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간뉴스 통신사 연합뉴스


[시간여행 1919] 참혹한 학살의 현장, 제암리

송고시간 | 2019-03-10 08:01

(화성=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1919년 경기도 화성은 독립을 향한 민중의 저항이 극렬했던 곳이다.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질렀으며,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기도 했다.


물론 일제의 탄압과 보복 응징도 강했다. 시위대에 총을 쏴 죽이고 연행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일제 만행의 결정판은 4월 15일 향남면 제암리에서 벌어졌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군인 11명, 일본인 순사 1명, 제암리에 살았던 순사보 조희창, 발안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일본인 거류단장 사사카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얼마 전 발안 지역 시위를

주도한 제암리의 주모자를 찾아내 없애려는 토벌대였다


화성 지역 만세운동은 크게 3월 26∼28일 송산 지역 사강 장터 시위, 31일 향남 지역 발안

장터 시위, 4월 3일 장안, 우정 지역 시위 등으로 전개됐다.


특히 31일 발안 장터 시위 때는 주민 1천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일본 경찰의 발포로 시위자 3명이 사망하자 흥분한 군중이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질렀다.

4월 3일에는 장안면과 우정면 주민이 합세해 독립 만세를 부르며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했다.


군중 2천여 명은 총을 쏘는 일본 경찰에 맞서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기에 이른다.

이에 일본군은 4월 5일 새벽 시위 진원지인 수촌리를 급습해 마을 전체

가옥 42호 가운데 40호를 불태웠다.


◇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참상 

제암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러 왔으니 다들 교회로 모이시오"

라고 하며 40세 이상 남자를 소집했다. 그러나 모이지 않자 15세 이상 남자들을 불러모았다.

이들은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키를 재서 총 길이 보다 작으면 돌려보내고 큰 사람은

예배당 안으로 들여보냈다.

교회 입구에 있던 일본군 병사들은 교회당 안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바닥에 앉아 있던 주민들은 뛰어오르고 쓰러지며,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3명이 교회를 탈출했으나 한 명은 총에 맞아 사살됐고, 다른 한 명은 집에 숨어 있다

처단됐다. 오직 노경태만이 탈출에 성공해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1982년 제암리 생존 주민 전동례 할머니는 "뒷동산에서 (한 여자가) 울고 있어서 왜 우느냐고 물으니까 '우리 남편이 저기 들어가더니 나오질 않는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일본군은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 안팎에 짚을 늘어놓고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질렀다.

또 집마다 불을 질러 제암리는 온통 화염에 휩싸였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죽은 사람을 창으로 찔렀고, 시체를 토막 내기도 했다. 또 이튿날까지 재가 30리 밖까지 날아가고, 송장 타는 냄새가 났다고 한다.

이렇게 학살된 사람은 23명이나 됐다.

제암리에서 만행을 저지른 뒤 일본군은 10분 거리에 있는 고주리로 향했다. 이곳은 발안 지역 시위를 주도한 천도교인의 전교실이 있는 곳이었다. 일본군은 고주리를 포위하고

천도교인 6명을 찾아내 칼로 난도질한 후 불태웠다.

하지만 이런 일제의 만행은 그냥 묻히지 않았다.

사건 발생 3일 후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이곳에 도착해 그 참혹한 광경을 사진 찍고 '일본군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세상에 공개했다.

해외 여론이 악화하자 일제는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해 무마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리타 중위는 학살 행위가 인정되면서도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 학살의 기억 남겨진 순국기념관 

현재 제암리에는 제암·고주리 학살 사건을 보여주는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제암리교회 옆에 마련돼 있다. 기념관 입구에는 1959년 제작된 3·1운동 순국 기념탑이 서 있다.

탑에는 월탄 박종화가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에 관해 쓴 글이 새겨져 있다.

"스물아홉 분의 순국열사는 이렇게 푸른 피를 불 속에 뿌려 겨레의 넋을 지켰다.(중략) 후세에 영원히 이 사실을 전하려 하여 당시 피화처였던 예배당 터에 정성을 모아 아담한

기념탑을 세운다"

기념관 안에는 화성 지역 3·1운동 전개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

제암리 학살 사건과 일제의 만행 사진이 함께 수록된 독립운동가 정한경의 '한국의 사정', 학살 사건 희생자 이름을 실은 독립운동가 이병헌의 '3·1운동비사', 화성 지역 만세시위 때 체포된 이들에 대한 법원의 판결문, 제암리 생존자들의 증언, 아리타 중위 판결문 등을 볼 수 있다.

또 유해발굴 당시 출토된 불탄 교회 건물 부재, 동전, 단추, 병 조각, 못 등이

참혹한 당시를 떠오르게 한다.

기념관은 전 세계의 집단학살에 관한 전시도 하고 있다. 간도 참변, 홀로코스트, 게르니카 학살, 난징 대학살, 코소보 사태, 캄보디아 킬링필드 등에 관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기념관 앞에는 23개의 크고 작은 돌기둥으로 이뤄진 '자유롭게 저 하늘을'이란 제목의 조형물이 들어서 있고, 뒤편 언덕에는 무참히 학살된 23인을 함께 모신 순국묘지가 있다.

언덕 아래에는 제암리의 참상을 세상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를 위한 공간도 있다. 카메라를 들고 바위에 앉아 있는 스코필드의 동상 옆에는 '그가 있어 제암리가 기억되고…

'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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