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웅의 여행톡] 100년전 횃불, '31㎞ 만세길'로 부활하다 > 보도자료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보도자료
> 기념관 소식 > 보도자료
보도자료

[정웅의 여행톡] 100년전 횃불, '31㎞ 만세길'로 부활하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1-24 09:04 조회152회 댓글0건

본문

돈이 보이는 스페셜 뉴스 Money S

[박정웅의 여행톡] 100년전 횃불, '31㎞ 만세길'로 부활하다

화성(경기)=박정웅 기자|입력 : 2019.01.24 06:09

절대 꺼지지 않는 '독립의 혼' 
3·1운동의 정신 꼿꼿이 아로새긴 '화성 만세길'
 

거사를 앞두고 산꼭대기마다 횃불이 솟았다. 횃불은 드센 독립 의지로 활활 타올랐다. 횃불은 무언의 약속이었다. 횃불은 이를 올린 이와 지켜보는 이들 모두를 단단히 묶었다. 서로 함께하겠다는 다짐 혹은 앞장서겠다는 맹세였다. 횃불은 마을을 지나면서 들불로 번졌다. 노도가 된 민중은 일제 폭거의 상징인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집어삼켰다. 또 일본 순사를 처단했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해다. 100년 전 횃불이 아로새긴 길을 미리 걸었다. 화성시가 오는 4월3일 공식 개통 예정인 ‘화성 3·1운동 만세길’이 그곳이다. 이 길은 1919년 4월3일 장안면과 우정면(읍) 일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만세운동의 족적을 복원한 노정이다.


◆100년 전 횃불, 만세길 비추다 

화성 3·1운동은 100년 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비단 이 지역의 독립운동만이 아니다. 3·1운동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의 기록이 온전치 못하다는 얘기가 많다. 자의반 타의반, 왜곡이나 축소가 100년이 넘는 세월의 더께를 쌓았기 때문이다. 당대와 해방공간, 일제 청산은커녕 여기 기생한 독재와 군사정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지우기까지 했다. 투쟁의 기록과 흔적이 변변한 데서 그 기억과 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애처롭다.  

지난 10~11일 찾은 화성 3·1운동 만세길도 마찬가지였다. 31㎞ 답사길 내내 허탈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화성지역은 특히 난개발 ‘화마’가 할퀴었다. 100년 전 횃불의 종적이야 오죽할까. 원래는 논과 밭과 산이었을 곳에 우후죽순 들어선 공장과 축사와 아파트. 산업도로는 물론 마을 이면도로까지 차지한 화물차와 승용차 행렬. 그리고 귓전에서 떠나지 않는 날카로운 전투기의 비행음….

이곳은 각종 개발에 이끌려 들어온 외지인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100년 전 횃불이 들불처럼 번진 엄연한 만세운동의 항쟁지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은 우리의 처절한 역사에는 잠시도 곁을 내주지 않는 듯했다. 지역을 관통하는 ‘만세로’ 지명이나 인근 향남읍의 제암리 학살사건 얘기를 꺼내면 그제야 맞장구칠 따름이다.  

다만 첫 행선지인 화성화수초등학교 인근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개통 전이라 마뜩한 이정표도 없는 초행길. 미세먼지를 배경으로 예보에도 없던 싸락눈까지 앞길을 막았다. 그때 지긋한 어르신이 화산리 주재소터를 가리켰다. 초등학교 정문 오른쪽의 기념비가 이곳이 만세길의 상징임을 말해줬다.

“1919년 4월1일. 우정면 보금산, 장안면 개죽산과 무봉산 등 인근의 산마다 횃불이 불타올랐다. 4월3일 수촌리의 백낙열은 준비된 태극기를 나누며 이봉구, 김익배, 김현조, 이종근, 우종렬, 우경규와 함께 지역민을 독려, 500여명을 동원했다. 화수리주재소장의 일본 순사를 참살했다. 이에 일제는 4월6~11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화수리까지 악랄한 만행을 저질렀다. 사망 22명, 부상 17명, 투옥 34명. 500여명의 지역민을 고문하고 폭행했다.”  


◆이례적인 조직적 무력항쟁 

경기 화성지역의 3·1운동은 흔히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기록된다. 일제는 만세운동에 나선 지역민을 교회에 가둔 뒤 불을 질러 학살했다. 또 불을 피해 교회를 빠져 나오는 이를 총살했다. 제암리와 고주리에서만 각각 30여명과 4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천인공노할 일제의 범죄는 한 선교사에 의해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보다 앞선 운동이 장안면과 우정면의 3·1운동이다. 이 운동은 비폭력 평화기조의 다른 지역 3·1운동과 다른 양상을 띠었다. 헌병과 경찰의 무단통치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조직적인 무력항쟁을 펼쳤다. 항일의 거센 흐름은 주재소를 불태웠고 일본 순사를 처단했다. 경술국치 이후 이례적인 만세운동으로 평가되는 점도 이 때문이다.  

​마을을 지날수록 지역민이 합류를 거듭한 만세운동. 자료에 따라 당시 4월3일을 되짚어봤다. 차희식 선생의 주곡리에서 30여명이 모였다. 차병혁 선생의 석포리를 지나니 50여명. 백낙열 선생과 수촌교회의 수촌리에서 100여명으로 불어나 어은리의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했다. 조암장 목하의 쌍봉산에서는 700여명으로, 장터에서는 1000여명으로 불었다. 김연방 선생의 사기말을 지나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했다. 이어 각리와 죽리를 거쳐 한각리에 모인 인파는 2000여명. 이들은 마침내 화수리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를 처단한다. 

만세꾼들이 한각리에서 주재소 공격 작전을 세웠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앞서 파괴된 장안면과 우정면사무소 소식을 화수리주재소가 모를 리 없을 것. 하지만 조직적으로 몰려오는 분노의 물결을 감당할 순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화성 3·1운동이 매우 조직적인 무력 투쟁이었음을 시사한다. 앞서 횃불로 결의를 다지면서 거삿날을 확인했다. 또 면사무소, 장터, 주재소에 이르기까지 세를 불려온 항일투쟁은 만세꾼들의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성 3·1운동이 조직적인 무력항쟁으로 전개된 이유는 여럿이다. 이곳의 만세꾼들은 비폭력 기조로 펼쳐진 다른 지역 3·1운동의 과정과 결과를 살폈을 것이다. 또 지역만의 분위기를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당시 화성 앞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 이에 따른 인력과 농수산물 강탈, 기독교(감리교)와 천도교를 접한 지역민의 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는 설명이다.

그 결과, 일제의 보복은 잔인했다. 마을이 불탔으며 사망자(22명), 부상자(17명), 투옥자(34명)가 속출했다. 나아가 제암리의 만행(4월15일)까지 이어졌으니 이곳의 만세운동이 그만큼 치열했음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화성 3·1운동은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다.

◆31㎞ 횃불 만세길, 4월3일 개통 

이제 화성 3·1운동이 100년 전 ‘그날’로 부활한다. 만세길 방문자센터-차희식 집터-차병혁 생가-개죽산 횃불 시위터-백낙열 집터-수촌리 수촌교회-장안면사무소터-쌍봉산-조암리-김연방 묘소-우정면사무소터-각리-죽리-한각리 광장터-최진성 집터-화수리 주재소터-만세길 방문자센터를 잇는 ‘화성 3·1운동 만세길’로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 길은 ‘31’㎞에 횃불 모양이다.

만세길 개통까지는 석달도 안 남은 현재, 흔적 지워진 곳곳에서 100년 전 기억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몇몇의 기록과 구전에 의존해 잔편을 꿰맞춰야 할 상황. 국내 유일의 3·1운동 테마길(걷기여행길)은 어쩌면 태생부터 가혹한 운명에 처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횃불의 ‘그날’로 향하는 발걸음은 거침없다.  

 

4월3일이면 100년 전 ‘횃불’이 31㎞ 만세길을 환하게 비출 것이다. 화성시는 지난가을 사전 프로그램에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만세길 전 구간을 복원해 화성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자료제공=화성시·한국의길과문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번주소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92-2 | 도로명주소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TEL : 031-366-1604 | FAX : 031-353-1615
Copyright(c)2017 제암리 3.1 운동순국기념관. All right reserved.